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스터 섬 (문단 편집) ==== 쇠망의 다른 견해들 ==== [[http://newspeppermint.com/2017/11/26/easterisland/|관련 링크]] 2000년대 후반부터 주요 [[과학]] 잡지에 발표되는 연구는 자뭇 조심스런 내용을 말하고 있다. 정착 이후 [[인구]] 증가와 [[자연]] 환경 파괴, 인구 정체와 어느 정도의 감소까지는 상식적인 선에서 인정되지만 자체적으로 균형점을 찾았으리라 짐작되고 있고, '[[종교]]와 기념상과 [[전쟁]]에 미쳐서 소수만 남아 [[석기 시대]]로 돌아가 지옥도인 것을 [[유럽인]]이 발견해 구원했다'는 식의 서구중심주의적 풀이는 점점 부정되는 분위기다. 유럽인이 도래하며 공동체를 파괴했고[* 다만 본토 유럽인은 아니다. 공동체를 파괴한 건 남미 원주민 피가 섞인 [[페루]]인이다.], 후손들은 구전 기억을 잃고, 인구 급감과 삼림의 소멸 역시 유럽인의 식민지화 시기와 연관됐다는 증거가 축적되고 있다.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것도 이스터 섬의 멸망의 원인은 될 수 없었다고 한다. [[1722년]] [[네덜란드인]] [[탐험가]] 야코프 로헤베인(Jacob Roggeveen)이 [[유럽인]] 최초로 이스터 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이스터 섬의 인구가 3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11&aid=0002625015|#]] 이스터 섬 최전성기의 인구가 최대 1만 5천 명으로 추산되므로 이미 매우 큰 감소가 있었던 것이다. [[고고학자]] 칼 리포와 테리 헌트는 이스터 섬에서 수집한 '마타아'라는 도구가 기존에 추정한 바와 달리 무기가 아니라 농경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내용을 antiquity라는 잡지에 발표했다.[[http://m.news.naver.com/read.nhn?sid1=104&oid=022&aid=0003018930&cid=883574|#]] [[http://www.ancient-origins.net/news-history-archaeology/new-study-asserts-easter-island-was-not-destroyed-warfare-005362|원문]] 화살촉과 같이 생긴 세모꼴의 흑요석을 막대기 끝에 끼운 형태의 마타아는 유럽인 도래 이전에 이스터 섬 원주민들이 서로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로 여겨져 왔지만, 이들은 마타아의 뭉툭한 모양으로 보았을 때 이것이 무기일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어떤 연구에서는 '인구의 극적인 감소' 자체가 거짓이라고 주장하곤 한다. 즉, 전성기의 인구라는 1만 5천 명이라는 추산치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휴먼카인드》의 저자 리트허르 브레흐만은 100명의 폴리네시아인들이 1100년경 섬에 상륙한다고 가정하고, 산업화 전에 인구가 달성할 수 있었던 최대치의 인구증가율인 연간 0.5%로 인구가 증가했다고 가정하면, 로헤베인이 섬에 상륙하였을 당시 주민들은 최대 2,200명일 뿐이라는 것이다. 서로 잡아 먹었다고 하는 주민 1만여 명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위의 칼 리포 역시 전성기 시절의 인구에 의문을 제기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